어젯밤 숙소가 있던 곳은 황매산이었지요. 거의 산꼭대기까지 올라온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정상은 아니더군요. 마저 이 산을 넘어가는 게 오늘의 코스입니다. 어제 내내 올라왔던 산을 넘어서 내려가는 길은 편안합니다. 아이들은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어제는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 같았다면서 오늘은 버스를 안 탈 수 있겠다고도 합니다. 아침에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시원해서 산 정상까지 오르막을 올라도 땀이 안 납니다.
컨디션이 안 좋았다고 얘기하는 걸 보면 어제의 힘겨움의 원인을 아이들도 나름대로 생각해 본 모양입니다. 지도자들도 이렇게 힘든 이유가 뭘까 고민을 나누면서 다양한 원인을 짚어보았었지요. 해마다 역대 최고를 갱신하는 폭염을 빼놓을 순 없지만, 지금까지 늘상 외부의 환경에서 오는 어려움에는 그에 걸맞은 대책을 세우면서 진행해 왔던 터라 날씨만을 탓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집중하는 방식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고민을 나눕니다. 이 방식이 제가 그동안 YMCA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배운 접근법이며, 매일 저녁 국토순례 지도자 회의에서 그날 하루를 돌아보며 다음날을 준비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벌써 17회가 된 국토순례 프로그램에는 해마다 새로운 지도자들이 합류하여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경험을 쌓아온 선배 지도자들이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경험에 따르면 해마다 국토순례 라이딩 첫날은 모든 지도자가 바짝 긴장합니다. 지도자들끼리도 처음 호흡을 맞추는 날이고, 아이들도 이런 대규모 단체 주행에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이 국토순례에 참가한 동기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즐겁고 자랑스러운 기억을 가져가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마치는 것일 테고요. 지도자들도 일주일 내내 혹시라도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염려하며 아이들을 지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긴장되는 날이 첫째 날인데, 그게 바로 어제였습니다.
국토순례 기간에 아이들이 많이 하는 질문 중에 하나는 왜 이렇게 산이 많냐는 겁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더 이상 페달을 굴릴 힘도 없을 때 옆에서 힘내라고 파이팅을 외치는 지도자를 원망하는 마음이 담긴 질문입니다. 저는 주로 우리나라 국토의 몇 %가 산악지형인 줄 아느냐는 반문으로 대답합니다. 70%라는 대답이 아이들에게서 금방 나오지요. 그럼 우리 코스의 70%가 산인 것도 자연스럽지 않냐고 다시 말해줍니다. 보통은 여기서 불만 섞인 아이의 표정으로 문답이 끝납니다.
물론 주행코스를 짜기에 따라서 쉬운 곳으로만 달릴 수도 있지만, 그래서야 무슨 재미가 있고, 무슨 의미가 남을까요? 오늘도 한 친구가 달리면서 힘들어 죽겠답니다. 큰 오르막을 죽을 둥 살 둥 넘으면서 하소연을 한 것인데, 딱히 해줄 말이 없어서 너 정말 멋지다고 해줬습니다. 그러니까 그 친구가 자기는 죽을 것 같은데 뭐가 멋있냐는 겁니다. 또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원래 죽을 것 같을 때가 멋있는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고 편안하게 있는 사람이 멋있어 보이냐고 되물었습니다. 아이가 반박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등에서 씩 웃는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이야기가 잠깐 딴 데로 샜는데요, 어제 첫날 코스가 김해에서 창원을 지나 의령에서 산청까지 넘어왔다는 말씀은 드렸던 것 같아요. 숙소는 산 정상 부근이었고요. 간단히 말해서 산을 아주 많이 넘어왔다는 뜻이고, 마지막에는 산을 거의 다 올랐다는 말입니다.
이야기가 많이 샌 것 같지만, 아직 힘겨움의 원인을 꼽아보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이루 말할 수 없이 더운 날씨 속에서, 서로 호흡을 맞춰가야 하는 지도자와 참가자들이, 굉장히 힘든 코스를 달렸다는 거죠. 셋 중에 하나만 있어도 힘든데 이 모든 난관이 한꺼번에 닥쳤으니 국토순례 프로그램 사상 최고로 어렵다고 느낄 만도 했습니다.
어제 다 못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볼까 합니다. 첫날 제가 약을 좀 팔았었지요? 국토순례가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YMCA 운동이 참 훌륭하다고요. 엉성한 약장수 노릇을 해봤는데, 다음 날 아침 발대식에서 좋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청소년, 기후, 통일 이 세 가지 주제를 모두 아우르는 “청소년 통일자전거 국토순례”야말로 한국 YMCA 운동의 핵심이 모두 들어있는 프로그램이라고요. 김경민 한국YMCA 사무총장님이 격려사 중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한국YMCA 청소년 통일자전거 국토순례”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이 얘기를 기억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청소년이 주체가 되어, 기후 위기를 생각하며, 통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은 실천은 없겠지요.
첫날이 가장 힘든 만큼 고민도 가장 많고, 사건사고도 많습니다만, 한 번에 다 풀어내기엔 밤이 너무 짧기 때문에 이제 오늘의 자전거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야지요. 자전거 국토순례를 오기 전에 아이들은 모두 다짐합니다. “난 절대로 버스를 안 탈 거야.”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7박 8일 600여km의 순례 일정을 모두 자전거로 완주하면 좋겠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자전거에 아직 미숙한 친구도 있고,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날그날 컨디션이 안 받쳐주는 친구도 있고요.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가장 느린 친구를 배려하면서 모두가 함께 주행하는 게 원칙이지만, 항상 그럴 수 있지도 않습니다. 체력이 소진되어 더 이상 페달을 굴릴 수 없는 친구는 다음 휴식지까지 “버스”를 타고 옵니다. 불의의 부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친구도 의료차에서 처치를 하고 “버스” 탑니다. 갑자기 자전거가 고장 나면 예비자전거를 내려주고 정비차에서 자전거를 수리해 주지만 예비 자전거가 남지 않았을 때에도 “버스”를 탑니다. 감기, 장염 등으로 아픈 친구들도 “버스”를 탑니다.
무슨 버스냐고요? “버스”는 자전거 행렬의 맨 뒤에서 든든하게 뒤따라오며 갖가지 사정이 생긴 친구들을 모두 태워줍니다. 지도자들은 아이들이 잠시 버스를 탔다고 해서 완주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아이가 엄살을 피우는 건 아닌가, 조금 더 노력해서 자기 한계를 극복할 수 있지는 않을까 고심하며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의사를 정확히 물은 다음 버스에 태우게 되죠.
그런데 아이들 사이에서는 버스를 타면 끝까지 자전거로 완주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합니다.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생각이고, 지도자들도 아이들의 의욕을 부추기기 위해 엄포를 놓기도 하니까요. 오늘은 어제와 비교해서 코스가 쉽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아침에 산 정상을 넘은 다음에는 계속해서 내리막을 내려왔으니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반전이 있기에 인생이 재밌는 거 아니겠어요? 쉬운 길은 아침 첫 코스로 끝났습니다. 나머지 오전에는 국도를 계속 오르내렸고, 오후에는 내내 오르막을 올랐습니다. 어제만큼 무지막지한 경사의 오르막이 아니라고 쉽게 봤지만, 완만하게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이 아이들의 지구력과 인내심을 시험에 들게 만들었지요.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지다가 경사가 살짝 급해지기라도 하면 그 순간 우수수 떨어집니다. 아이들의 발이요. 페달에서.
어제 버스를 탄 인원이 총 100명이라고 말씀드렸었죠. 국토순례 참가자가 모두 60명인데 어떻게 100명이 버스를 탔는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금방 답을 찾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같은 친구가 여러 번 버스를 탄 거죠. 오늘 버스에 타지 않고 끝까지 달린 친구는 60명 가운데 18명에 그쳤습니다. 제 뒤에 따라오던 친구의 입에서는 욕설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고, 많은 참가자가 악이 바친 함성을 질러대며 올라갔습니다. 자기와의 격렬한 싸움 중에 터져 나온 함성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만 내리고 싶다거나, 나도 버스를 타고 싶다거나,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겠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무수한 잡념을 떨치고 끝까지 페달을 밟은 18명의 어깨는 오늘 오른 오르막보다도 높이 올라갔을 겁니다.
문제는 열심히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의 눈에 버스를 자주 타는 아이들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사람이 안락함에 익숙해지면 어지간해서는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걸 다들 잘 아실 겁니다. 버스를 경험한 아이들은 자전거에 다시 오르기가 더 어렵습니다. 또 자전거에서 발을 쉽게 내리게 되고요. 그러니 버스의 단골손님이 생기고, 단골손님들이 쉬는 시간마다 쌩쌩한 모습으로 버스에서 내려 음료와 간식을 먹고 있으면 얄미워 보이는 아이들도 생깁니다. 지치고 힘든 상태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날 선 반응을 보일 테고요. 각자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자는 얘기를 해보지만, 이해와 신뢰가 쌓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남은 기간에 그런 기회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여기서 마칩니다.
오늘의 명언
“평상시의 하루하루가 정말 소중하게 느껴져요.” - 참가자 강규민(13세)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가 이렇게 소중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 참가자 한지성(17세)
아이들에게 소중함을 깨우쳐준 하루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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